안에서부터의 동기 — 더 깊은 엔진의 결
「오늘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 같은 일을 같은 자리에서 하고 있는데도, 어떤 날의 결은 안에서부터 부드럽게 흐르고, 어떤 날의 결은 바깥의 결에 끌려가듯 무거워집니다. 같은 사람의 같은 일인데 결의 풍경이 이렇게 다른 자리에 자주 놓이는 자세를 우리는 「동기(motivation)」라는 결로 부르곤 합니다. 이 글은 동기 중에서도 「안에서부터」 흐르는 결, 즉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의 결을 EQ의 한 결로서 자기성찰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들여다봅니다 — 「열정만 있으면 된다」 같은 단정도, 「어차피 동기는 타고나는 것이다」 같은 단정도 아닌, 그 사이의 결을 부르는 자리입니다.
「동기」라는 결의 두 풍경
심리학에서 동기의 결은 크게 두 풍경으로 자주 부릅니다. 바깥의 결에서 오는 외재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와, 안에서부터 흐르는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의 결입니다. 외재적 동기는 보상의 결, 인정의 결, 평가의 결, 처벌을 피하는 결처럼 「바깥에서 부르는 결」에 가깝습니다. 내재적 동기는 호기심의 결, 의미의 결, 결의 흐름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의 결처럼 「안에서 자라는 결」에 가깝습니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을 정리한 데시(Deci)와 라이언(Ryan)은 사람의 안에 자율성(autonomy)·유능성(competence)·관계성(relatedness)이라는 세 결의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세 결이 일상에서 채워지는 자리에서 내재적 동기의 결이 자라기 쉽다는 풍경이 자주 보고됩니다. 「내가 결정하고 있다는 결」, 「내가 한 결씩 잘하게 되고 있다는 결」, 「누군가와 결이 이어져 있다는 결」 — 이 세 결은 동기의 결을 안에서부터 부르는 자리입니다.
골먼(Goleman, 1995)이 정리한 EQ의 다섯 결 중 「동기(motivation)」도 사실 이 내재적 동기의 결에 가깝습니다. 그는 동기의 결을 「외부 보상이 아닌, 결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결」이라고 부르며, 자기인식·자기조절의 결과 함께 가는 결로 보았습니다. 동기의 결이 EQ의 한 차원으로 자리잡은 자세는 그것이 단순히 「의지의 결」이 아니라 「자기 결을 알아보고 자기 결과 함께 가는 결」이라는 풍경을 보여 줍니다.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의 결
두 결의 차이를 한 자리에 모아 두면, 자기 결을 들여다볼 때 자주 도움이 됩니다.
| 결의 갈래 | 외재적 동기 | 내재적 동기 |
|---|---|---|
| 결의 출처 | 보상·평가·처벌 회피 | 호기심·의미·결 자체의 즐거움 |
| 결의 지속 | 보상이 사라지면 결이 약해짐 | 비교적 길게 자리잡음 |
| 결의 풍경 | 「해야 한다」 | 「하고 싶다·궁금하다」 |
| 자율성의 결 | 낮은 자리 | 높은 자리 |
| 결의 자리 | 결과에 가까움 | 과정에 가까움 |
이 표는 「외재적 동기는 나쁘고 내재적 동기는 좋다」는 단정의 결이 아닙니다. 외재적 동기의 결도 일상의 결을 굴리는 데 꼭 필요한 자리에 있습니다. 월급의 결이 없다면 일의 결이 자리잡기 어렵고, 마감의 결이 없다면 미루는 결이 자라기 쉽습니다. 다만 「외재적 동기의 결만으로 굴러가는 결」은 시간이 흐르면 결이 마르기 쉽다는 풍경이 자주 보고됩니다. 결의 깊은 자리에 내재적 동기의 결이 함께 자리잡고 있을 때 결이 더 길게 자리잡는 자세에 가깝습니다.
흥미로운 한 결은, 외재적 보상이 오히려 내재적 동기의 결을 깎는 자리도 자주 보고된다는 점입니다. 「과잉정당화 효과(overjustification effect)」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결입니다. 좋아서 하던 결에 보상의 결이 붙으면, 그 결을 「보상 때문에 하는 결」로 다시 부르게 되어 보상이 사라진 뒤 결의 흐름이 약해지는 자리입니다. 이 풍경은 내재적 동기의 결이 의외로 섬세한 결이라는 자세를 보여 줍니다.
자율성·유능성·관계성 — 세 결의 자리
자기결정이론의 세 결을 일상의 자리에 두고 들여다보면, 동기의 결이 어디에서 마르고 어디에서 자라는지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자율성의 결은 「내가 결정하고 있다는 결」입니다. 같은 일이라도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결과 내가 골라서 하는 결의 풍경은 매우 다릅니다. 일터에서 같은 보고서를 쓰는 자리에서도, 「어떤 결로 쓸지」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결이 한 줄이라도 있을 때 결이 부드럽게 흐릅니다. 부모의 결, 상사의 결, 사회의 결이 자기 결의 자리를 모두 채워 두면 동기의 결이 마르기 쉽습니다.
유능성의 결은 「한 결씩 잘하게 되고 있다는 결」입니다. 너무 쉬운 자리는 결이 빨리 마르고, 너무 어려운 자리는 결이 꺾이기 쉽습니다. 자기 결의 풍경에 살짝 도전이 되는 자리에서 결이 가장 자라기 쉽다는 풍경은, 칙센트미하이(Csikszentmihalyi)가 부른 「몰입(flow)」의 결과도 닿아 있습니다.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것 같은 자리」가 동기의 결이 자라는 자리입니다.
관계성의 결은 「누군가와 결이 이어져 있다는 결」입니다. 일을 함께하는 사람의 결이 어떤 자리에 있는가, 자기 결의 풍경을 알아봐 주는 결이 곁에 있는가, 자기 결을 부르는 자리에 안전한 결이 있는가 — 이런 결의 풍경은 동기의 결을 깊은 자리에서 받쳐 줍니다. 혼자만의 결로 모든 동기를 굴리려는 자세는 의외로 결을 빨리 마르게 합니다.
세 결 중 어느 결이 자기 결의 일상에서 부족한가를 한 번 들여다보는 자세 자체가 자기성찰의 한 결입니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세 결 중 어느 결의 자리가 비어 있는가」로 결을 다시 부를 수 있다면, 동기의 결을 들여다보는 풍경이 부드럽게 달라집니다.
의미의 결과 동기의 결
내재적 동기의 결을 깊이 부르는 또 한 자리는 「의미(meaning)」의 결입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자기 결의 풍경 안에서 그 일이 어떤 결과 이어져 있는가를 부를 수 있다면, 동기의 결이 안에서부터 자랍니다.
빅터 프랑클(Viktor Frankl)이 정리한 「의미의 결」은 가장 어려운 자리에서도 사람이 결을 굴릴 수 있는 결이 의미의 결과 닿아 있다는 풍경을 보여 줍니다. 일상의 자리에서 의미의 결은 거대한 사명의 결만이 아니라, 「오늘 이 일이 누구의 결에 닿는가」, 「이 결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같은 작은 결의 자리에서도 자주 자랍니다.
다만 의미의 결을 「항상 의미를 느껴야 한다」는 결로 미끄러뜨리지 않는 자세가 정직합니다. 어떤 날의 결은 의미의 결이 잘 부르지 않는 자리에 놓이고, 어떤 시기의 결은 결의 풍경 전체가 흐릿하게 자리잡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한 결씩 일상의 결을 부르는 자세 자체가 결국 의미의 결을 다시 부르는 결로 이어진다는 풍경이 자주 관찰됩니다. 「의미가 자라야 결을 굴린다」가 아니라 「결을 한 결씩 굴리는 자세에서 의미의 결이 다시 자라기도 한다」는 양방향의 결입니다.
한국 사회의 결 안에서 본 안에서부터의 동기
한국 사회의 결 안에서 「안에서부터의 동기」를 부르는 자세는 의외로 어려운 자리에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시험의 결, 비교의 결, 평가의 결이 결의 풍경을 빽빽하게 채우는 결 안에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부드럽게 들여다볼 결의 자리가 자주 비어 있습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결」, 「사회가 부르는 결」, 「남들이 가는 결」이 자기 결의 자리를 먼저 채우는 풍경이 흔합니다.
이 결의 자리에서 「안에서부터의 동기를 찾으세요」 같은 단정은 의외로 무겁게 들립니다. 한 번도 자기 결의 흐름을 부드럽게 들여다본 적이 없는 결의 자리에서, 갑자기 안에서부터의 결을 부르라는 자세는 또 다른 「해야 한다」의 결이 되기 쉽습니다.
오히려 정직한 결은 「작은 결의 호기심을 한 번 들여다보는 자세」에서 출발하는 자리에 가깝습니다. 「오늘 어떤 자리에서 결이 살짝 가벼웠는가」,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의 결이 빠르게 흘렀는가」, 「어떤 자리에서 결이 빨리 말랐는가」 — 이런 작은 결의 결을 들여다보는 자세가 결국 자기 결의 안에서부터의 동기의 결을 부르는 출발점이 됩니다. 큰 결의 「열정」을 찾는 자세보다, 작은 결의 「관심」을 들여다보는 자세가 더 자연스러운 결입니다.
흔한 오해 — 「열정만 있으면 된다」
내재적 동기의 결을 「열정」의 결로 좁혀 부르는 자리는 일상에 매우 흔합니다. 「열정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열정이 없으면 어차피 안 된다」 같은 결의 단정이 자주 들립니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 결의 풍경은 의외로 위험합니다.
첫 번째 자리는 「열정의 결만으로 굴러가는 자세는 의외로 빨리 마른다」는 풍경입니다. 열정의 결은 강한 결이지만 일정한 결로 흐르지 않습니다. 의도적인 연습의 결, 작은 결의 습관, 자기조절의 결이 함께 자리잡지 않으면 열정의 결만으로는 결이 길게 자리잡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 자리는 「열정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결이 자기 결을 닫아 두는 풍경입니다. 「나는 아직 열정의 결을 못 찾았으니까 시작도 안 한다」 같은 결의 자세는, 사실 안에서부터의 동기가 결을 한 결씩 부르는 자세에서 자라기도 한다는 풍경을 놓치는 자리입니다. 결을 한 결씩 굴리는 자세에서 결의 흥미가 자라는 결도 일상에 자주 관찰됩니다.
세 번째 자리는 「열정 추구」의 결이 오히려 자기 결을 단정 짓는 풍경입니다. 「내 열정은 이것이다」라고 한 번 부른 결을 평생 그 결로 자리잡게 두는 자세는, 결의 변화의 결을 닫아 두기 쉽습니다. 자기 결의 흐름은 시간과 함께 결이 바뀌는 결이 자연스럽고, 안에서부터의 동기의 결도 그 결과 함께 자리를 옮기는 자세가 정직합니다.
Brambin EQ에서 자기 결의 다섯 차원을 한 번 들여다보세요 — 점수의 한 줄이 아니라, 결의 다섯 모양 중 동기의 결이 일상의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부르는 거울로 사용해 보세요.
일상에서 안에서부터의 결을 부르는 작은 자리
안에서부터의 동기의 결을 일상에서 부르는 자세를 몇 가지 자리에서 떠올려 봅니다. 「오늘부터 열정을 찾자」 같은 큰 결보다, 결을 한 결씩 작게 부르는 자세가 더 자연스럽게 자리잡습니다.
첫 번째 자리 — 「오늘 결이 가벼웠던 한 자리」를 떠올리는 결. 하루의 결을 마치는 자리에서 「오늘 어떤 자리에서 결이 살짝 가벼웠는가」를 한 번 부르는 자세는, 자기 결의 안에서부터의 결의 풍경을 조금씩 보여 줍니다. 큰 자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한 잔의 차의 결, 누군가의 한 마디의 결, 한 줄의 글의 결 — 작은 결의 자리에서 출발하면 좋습니다.
두 번째 자리 — 「왜 이 결을 하고 있는가」를 한 번 부르는 결. 같은 일을 같은 자리에서 하고 있을 때, 한 호흡 멈추고 「오늘 이 결을 왜 하고 있는가」를 한 번 부르는 자세는 결의 풍경을 다시 자리잡게 합니다. 「해야 해서」라는 결이 떠오르는 자리도 있고, 「내가 골라서」라는 결이 떠오르는 자리도 있습니다. 어느 결이 떠오르든 그 결을 들여다보는 자세 자체가 자기성찰의 한 결입니다.
세 번째 자리 — 「작은 결의 자율성을 한 줄 부르는」 결. 외부의 결로 굴러가는 결의 자리에서도, 「오늘 이 부분만큼은 내가 결을 정한다」는 작은 결을 한 줄 부르는 자세는 자율성의 결을 다시 자리잡게 합니다. 큰 결의 자율성이 어려운 자리에서도, 작은 결의 자율성은 의외로 자주 부를 수 있는 결입니다.
네 번째 자리 — 「조금만 더 하면 닿을 자리」를 정하는 결. 너무 쉬운 결도 너무 어려운 결도 결을 마르게 합니다. 자기 결의 풍경에 살짝 도전이 되는 자리를 한 호흡 정해 두는 자세는 유능성의 결을 부드럽게 자라게 합니다. 「오늘은 이 한 결만 한 호흡 더 깊이 부르겠다」 같은 작은 결의 자리입니다.
다섯 번째 자리 — 「누군가와 결을 한 번 잇는」 결. 안에서부터의 동기의 결은 의외로 혼자만의 결이 아닙니다. 자기 결의 풍경을 알아봐 주는 결과, 자기 결을 부드럽게 부르는 결의 자리가 곁에 있을 때 동기의 결이 더 깊이 자리잡습니다. 하루의 결 안에서 누군가와 결을 한 번 잇는 자세를 한 결씩 부르는 자세도 동기의 결의 한 자리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안에서부터의 동기의 결은 키울 수 있나요?
「키운다」는 결보다 「자라기 쉬운 자리를 마련한다」는 결이 더 정직합니다. 자기결정이론의 세 결 — 자율성·유능성·관계성 — 의 결이 일상에서 채워지는 자리에서 내재적 동기의 결이 자라기 쉽다는 풍경이 자주 보고됩니다. 다만 동기의 결을 「의지의 결로 끌어올린다」고 부르기는 어렵고, 「자기 결의 풍경을 들여다보고 작은 결의 자리를 한 결씩 마련한다」는 결이 더 자연스러운 자세입니다.
외재적 동기의 결은 나쁜 결인가요?
외재적 동기의 결은 「나쁜 결」이 아니라 「일상의 결을 굴리는 데 자주 필요한 결」입니다. 월급의 결, 마감의 결, 평가의 결 — 이 결들은 일상의 결을 받쳐 주는 자리에 있습니다. 다만 외재적 동기의 결만으로 굴러가는 결은 시간이 흐르면 결이 마르기 쉽고, 깊은 자리에 내재적 동기의 결이 함께 자리잡고 있을 때 결이 더 길게 자리잡는 자세에 가깝습니다. 두 결을 「대립의 결」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결」로 부르는 자세가 정직합니다.
「열정의 결」을 못 찾았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열정의 결을 찾아야 한다」는 결의 부담을 한 번 내려놓는 자세에서 출발하면 좋습니다. 안에서부터의 동기의 결은 큰 결의 「열정」보다 작은 결의 「관심」의 자리에서 자주 자랍니다. 「오늘 결이 살짝 가벼웠던 한 자리」, 「시간의 결이 빠르게 흘렀던 한 자리」, 「결이 빨리 말랐던 한 자리」를 한 결씩 들여다보는 자세가 자기 결의 안에서부터의 결의 풍경을 보여 주는 출발점입니다. 결의 흐름을 한 호흡 멀리서 들여다보면 됩니다.
보상의 결이 동기의 결을 깎는다는 결은 정말인가요?
「과잉정당화 효과(overjustification effect)」라는 이름으로 보고되는 결입니다. 좋아서 하던 결에 보상의 결이 붙으면, 그 결을 「보상 때문에 하는 결」로 다시 부르게 되어 보상이 사라진 뒤 결의 흐름이 약해지는 자리입니다. 다만 모든 보상의 결이 같은 결로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결의 자리를 인정하는 결, 결의 의미를 부르는 결의 보상은 오히려 내재적 동기의 결을 받쳐 주는 풍경도 자주 관찰됩니다. 결의 결과 결의 자리에 따라 보상의 결이 다르게 작동한다는 자세가 정직합니다.
동기의 결이 마른 자리에서는 어떻게 하나요?
먼저 「의지의 결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결을 한 번 내려놓는 자세가 정직합니다. 동기의 결이 마른 자리는 자기 결의 풍경에 무언가가 닫혀 있다는 신호의 결인 자리가 자주 있습니다. 자율성의 결이 너무 좁아진 자리, 유능성의 결이 꺾인 자리, 관계성의 결이 마른 자리, 의미의 결이 흐릿해진 자리 — 어느 결의 자리가 비어 있는지를 한 호흡 들여다보는 자세가 출발점입니다. 일상에 큰 어려움이 지속된다면 — 무기력의 결이 깊고 길게 자리잡는다면 — 자기 결의 결로 단정하기보다 정신건강 전문가의 결을 만나는 자세가 적절합니다.
마무리
안에서부터의 동기의 결은 「열정의 결」도 「의지의 결」도 아닙니다. 자율성의 결, 유능성의 결, 관계성의 결이 일상에서 한 결씩 채워지는 자리에서 자라는, 더 깊은 엔진의 결입니다. 외재적 동기의 결과 대립하는 결이 아니라, 그 결의 깊은 자리에서 결을 받쳐 주는 자세에 가깝습니다.
자기 결의 안에서부터의 결을 부르는 자세는 큰 결의 「열정 찾기」가 아니라, 작은 결의 「관심 들여다보기」에서 출발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오늘 결이 가벼웠던 한 자리」를 떠올리는 결, 「왜 이 결을 하고 있는가」를 한 번 부르는 결, 「작은 결의 자율성」을 한 줄 부르는 결 — 이 작은 결들의 자세가 결국 안에서부터의 동기의 결을 부드럽게 자리잡게 합니다.
「동기가 없어서 못 한다」는 결을 「세 결 중 어느 결의 자리가 비어 있는가」로 한 번 다시 부르는 자세, 그 한 호흡이 결국 안에서부터의 동기의 결을 부르는 자리에 우리를 데려다 놓습니다. 일상의 작은 결 한 결을 오늘 한 번 부르는 자세에서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Brambin EQ는 자기성찰과 엔터테인먼트를 위한 도구입니다. 의학적·심리학적·진단 도구가 아니며, 전문가의 조언을 대체하지 않습니다.